2023 수능/국어 - 수필

<산촌 여정>, 이상

의대 가고싶은 샐리 2022. 9. 30. 13:10

향기로운 엠제이비(MJB, 커피의 일종)의 미각을 잊어 버린 지도 이십여 일이나 됩니다. 이곳에는 신문도 잘 아니오고 체전부(遞傳夫, 우체부)는 이따금 '하도롱' 빛 소식(갈색 봉투에 담긴 편지)을 가져옵니다. 거기는 누에고치와 옥수수의 사연(농부들의 생활)이 적혀 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멀리 떨어져 사는 일가 때문에 수심이 생겼나봅니다. 나도 도회에 남기고 온 일이 걱정이 됩니다.

건너편 팔봉산에는 노루와 멧돼지가 있답니다. 그리고 기우제 지내던 개골창(개울)까지 내려와서 가재를 잡아먹는 곰을 본 사람도 있습니다. 동물원에서밖에 볼 수 없는 짐승, 산에 있는 짐승들을 가로잡아다가 동물원에 갖다 가둔 것이 아니라, 동물원에 있는 짐승들을 이런 산에다 내어 놓아준 것만 같은 착각을 자꾸 느낍니다.밤이 되면 달도 없는 그믐 칠야(漆夜)에 팔봉산도 사람이 침소로 들어가듯이 어둠 속으로 아주 없어져 버립니다.

그러나 공기는 수정처럼 맑아서 별빛만으로라도 넉넉히 좋아하는 '누가복음'도 읽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또 참 별이 도회에서보다 갑절이나 더 많이 나옵니다. 하도 조용한 것이 처음으로 별들의 운행하는 기척이 들리는 것도 같습니다.

객줏집 방에는 석유 등잔을 켜 놓습니다. 그 도회지의 석간(夕刊)과 그윽한 내음새가 소년 시대의 꿈을 부릅니다. 정 형! 그런 석유 등잔 밑에서 밤이 이슥하도록 호까―― 연초갑지(烟草匣紙, 담뱃값 종이)――붙이던 생각이 납니다. 베짱이 한 마리 등잔에 올라앉아서 그 연둣빛 색채로 혼곤한 내 꿈에 마치 영어 티(T)자를 쓰고 건너 긋듯이 유(類)다른 기억에다는 군데군데 언더라인을 하여 놓습니다. 슬퍼하는 것처럼 고개를 숙이고 도회의 여차장이 차표 찍는 소리 같은 그 성악을 가만히 듣습니다. 그러면 그것이 또 이발소 가위 소리와도 같아집니다. 나는 눈까지 감고 가만히 또 자세히 들어봅니다.

그리고 비망록을 꺼내어 머룻빛 잉크로 산촌의 시정(詩情)을 기초(起草)합니다.


그저께신문을찢어 버린 
때묻은흰나비
봉선화는아름다운애인의귀처럼생기고 
귀에보이는지난날의기사
얼마 있으면 목이 마릅니다. 자리물 


심해처럼 가라앉은 냉수를 마십니다. 석영질 광석 내음새가 나면서 폐부에 한란계(寒煖計, 온도계) 같은 길을 느낍니다. 나는 백지 위에 싸늘한 곡선을 그리라면 그릴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청석(靑石) 얹은 지붕에 별빛이 내려쬐면 한겨울에 장독 터지는 것 같은 소리가 납니다. 벌레 소리가 요란합니다. 가을이 이런 시간에 엽서 한 장에 적을 만큼씩 오는 까닭입니다.이런 때 참 무슨 재주로 광음을 헤아리겠습니까? 맥박 소리가 이 방안을 방째 시계를 만들어 버리고 장침과 단침의 나사못이 돌아가느라고 양짝 눈이 번갈아 간질간질합니다. 코로 기계 기름 냄새가 드나듭니다. 석유 등잔 밑에서 졸음이 오는 기분입니다.

파라마운트 회사 상표처럼 생긴 도회 소녀가 나오는 꿈을 조금 꿉니다. 그러다가 어느 도회에 남겨 두고 온 가난한 식구들을 꿈에 봅니다. 그들은 포로들의 사진처럼 나란히 늘어섭니다. 그리고 내게 걱정을 시킵니다. 그러면 그만 잠이 깨어 버립니다. 죽어 버릴까 그런 생각을 하여 봅니다. 벽 못에 걸린 다 해진 내 저고리를 쳐다봅니다. 서도(西道) 천리(千里)를 나를 따라 여기 와 있습니다그려!

등잔 심지를 돋우고 불을 켠 다음 비망록에 철필로 군청빛 '모'를 심어 갑니다. 불행한 인구가 그 위에 하나하나 탄생합니다. 조밀한 인구가――.

내일은 진종일 화초만 보고 놀리라, 탈지면에다 알콜을 묻혀서 온갖 근심을 문지르리라, 이런 생각을 먹습니다. 너무도 꿈자리가 뒤숭숭하여서 그러는 것입니다. 화초가 피어 만발하는 꿈 '그라비아' 원색판 꿈 그림책을 보듯이 즐겁게 꿈을 꾸고 싶습니다. 그러면 간단한 설명을 위하여 상쾌한 시를 지어서 7포인트 활자로 배치하는 것도 좋습니다.

도회에 화려한 고향이 있습니다. 활엽수만으로 된 산이 고향의 시각을 가려 버린 이 산촌에 팔봉산 허리를 넘는 철골전주가 소식의 제목만을 부호로 전하는 것 같습니다.

아침에 볕에 시달려서 마당이 부시럭거리면 그 소리에 잠이 깨입니다. 하루라는 '짐'이 마당에 가득한 가운데 새빨간 잠자리가 병균처럼 활동입니다. 끄지 않고 잔 석유 등잔에 불이 그저 켜진 채 소실된 밤의 흔적이 낡은 조끼 '단추'처럼 남아 있습니다. 작야(昨夜)를 방문할 수 있는 요비링입니다. 지난 밤의 체온을 방안에 내어 던진 채 마당에 나서면 마당 한 모퉁이에는 화단이 있습니다. 불타오르는 듯한 맨드라미꽃 그리고 봉선화. 지하에서 빨아올리는 이 화초들의 정열에 호흡이 더워오는 것 같습니다. 여기 처녀 손톱 끝에 물들은 봉선화 중에는 흰 것도 섞였습니다. 흰 봉선화는 꼭두서니 빛으로 곱게 물듭니다.

수수깡 울타리에 오렌지빛 유자가 열렸습니다. 당콩넝쿨과 어우러져서 세피아 빛을 배경으로 하는 일폭의 병풍입니다. 이 끝으로는 호박넝쿨 그 소박하면서도 대담한 호박꽃에 스파르타식 꿀벌이 한 마리 앉아 있습니다. 농황색(濃黃色)에 반영되어 '세실 · B · 데일'의 여오하처럼 화려하며 황금색으로 치사합니다. 귀를 기울이면 르네쌍스 응접실에서 들리는 선풍기 소리가 납니다.

야채사라다에 놓이는 아스파라가스 잎사귀 같은 또 무슨 화초가 있습니다. 객줏집 아해에게 물어봅니다. 기상꽃 ―― 기생화란 말입니다. 무슨 꽃이 피나――진홍비단꽃이 핀답니다.

선조(先祖)가 지정하지 아니한 조셋트 치마에 웨스트민스터 궐련(卷烟)을 감아 놓은 것 같은 도회의 기생의 아름다움을 연상하여 봅니다. 박하보다도 훈훈한 리그레추윙껌 내음새 두꺼운 장부를 넘기는 듯한 그 입맛 다시는 소리――그러나 아마 여기 필 기생꽃은 분명히 혜원 그림에서 보는 것 같은―― 혹은 우리가 소년시대에 보던 떨떨이 인력거에 홍일산(紅日傘) 받은 지금은 지난 날의 삽화인 기생일 것 같습니다.

청둥호박이 열렸습니다. 호박꼬자리에 무 시루떡, 그 훅훅 끼치는 구수한 김에 좇아서 증조할아버지의 시골뜨기 망령들은 정월 초하룻날 한식날 오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 국가 백 년의 기반을 생각케 하는 넙적하고도 묵직한 안정감과 침착한 색채는 럭비구를 안고 뛰는 이 제네레이션의 젊은 용사의 굵직한 팔뚝을 기다리는 것도 같습니다.

유자가 익으면 껍질이 벌어지면서 속이 삐져 나온답니다. 하나를 따서 실 끝에 매어서 방에다가 걸어둡니다. 물방울져 떨어지는 풍염(豊艶)한 미각 밑에서 연필같이 수척하여 가는 이 몸에 조금씩 살이 오르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 야채도 과실도 아닌 유머러스한 용적(容積)에 향기가 없습니다. 다만 세수 비누에 한겹씩 한겹씩 해소되는 내 도회의 육향이 방안에 배회할 뿐입니다.

팔봉산 올라가는 초경(草徑) 입구 모퉁이에 최×× 송덕비와 또 ×××× 아무개의 영세(永世) 불망비(不忘碑)가 항공 우편 포스터처럼 서 있습니다. 듣자니 그들은 다 아직도 생존하여 계시다 합니다. 우습지 않습니까.

교회가 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 성역을 수만 리 떨어져 있는 이 마을의 농민들까지도 사랑하는 신 앞에서 회개하고 싶었습니다. 발길이 찬송가 소리 나는 곳으로 갑니다. 포플라나무 밑에 염소 한 마리를 매어 놓았습니다. 구식으로 수염이 났습니다. 나는 그 앞에 가서 그 총명한 동공을 들여다 봅니다. 셀룰로이드로 만든 정교한 구슬을 오브라드로 싼 것 같이 맑고 총명하고 깨끗하고 아름답습니다. 도색(挑色) 눈자위가 움직이면서 내 삼정(三停)과 오악(五岳)이 고르지 못한 빈상(貧相)을 업신여기는 중입니다. 

옥수수밭은 일대 관병식(觀兵式)입니다. 바람이 불면 갑주(甲胄) 부딪치는 소리가 우수수 납니다. 카아마인빛 꼬꼬마(실 끝에 종이오리나 새털을 붙여 날리는 어린이 장난감의 한 가지)가 뒤로 휘면서 너울거립니다. 팔봉산에서 총소리가 들렸습니다. 장엄한 예포 소리가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내 곁에서 소조(小鳥)의 간을 떨어뜨린 공기총 소리였습니다. 그리면 옥수수밭에서 백, 황, 흑, 회, 또 백, 가지각색의 개가 퍽 여러 마리 열을 지어서 걸어 나옵니다. 센슈얼한 계절의 흥분이 이 코삭크(Cossack) 관병식을 한층 더 화려하게 합니다.

산삼이 풀어져 흐르는 시대 징검다리 위에는 백채(白菜) 씻은 자취가 있습니다. 풋김치의 청신한 미각이 안약 '스마일'을 연상시킵니다. 나는 그 화성암으로 반들반들한 징검다리 위에 삐뚤어진 N자로 쪼그리고 앉았노라면 시야에 물동이를 이고 주저하는 두 젊은 새악시가 있습니다. 나는 미안해서 일어나기는 났으면서도 일부러 마주 보면서 그리로 걸어갑니다. 스칩니다. 하도롱 빛 피부에서 푸성귀 내음새가 납니다. 코코아 빛 입술은 머루와 다래로 젖었습니다. 나를 아니 보는 동공에는 정제된 창공이 간쓰메가 되어 있습니다.

 

 

 

'2023 수능 > 국어 - 수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추사 글씨>, 김용준  (0) 2022.09.30
<신록예찬>, 이양하  (0) 2022.09.30
<존재의 테이블>, 나희덕  (0) 2022.09.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