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시 5

<산은 알고있다>, 신석정

산은 어찌보면 운무(雲霧)와 더불어 항상 저 아득한 하늘을 연모(戀慕)하는 것 같지만 오래 오래 겪어온 피 묻은 역사의 그 생생한 기억을 잘 알고 있다. 산은 알고 있다. 하늘과 땅이 처음 열리고 그 기나긴 세월에 묻어간 모든 서럽고 빛나는 이야기를 너그러운 가슴에서 철철이 피고 지는 꽃들의 가냘픈 이야기보다도 더 역력히 알고 있다. 산은 가슴 언저리에 그 어깨 언저리에 스며들던 더운 피와 그 피가 남기고 간 이야기와 그 이야기가 마련하는 역사와 그 역사가 이룩할 줄기찬 합창合唱소리도 알고 있다. 산은 역력히 알고 있는 것이다. 이슬 젖은 하얀 촉루(髑髏)가 딩구는 저 능선(稜線)과 골짜구니에는 그리도 숱한 풀과 나무와 산새와 산새들의 노랫소리와 그리고 그칠 줄 모르고 흘러가는 시냇물과 시냇물이 모여서 ..

<누룩>, 이성부

누룩 한 덩어리가 뜨는 까닭을 알겠느냐. 지 혼자 무력함에 부대끼고 부대끼다가 어디 한군데로 나자빠져 있다가 알맞은 바람 만나 살며시 더운 가슴, 그 사랑을 알겠느냐. 오가는 발길들 여기 멈추어 밤새도록 우는 울음을 들었느냐. 지 혼자서 찾는 길이 여럿이서도 찾는 길임을 엄동설한 칼별은 알고 있나니. 무르팍 으깨져도 꽃피는 가슴. 그 가슴 울림 들었느냐. 속 깊이 쌓이는 기다림 삭고 삭아 부서지는 일 보았느냐. 지가 죽어 썩어 문드러져 우리 고향 좋은 물 만나면 덩달아서 함께 끓는 마음을 알겠느냐. 춤도 되고 기쁨도 되고 해솟는 얼굴도 되는 죽음을 알겠느냐. 아 지금 감춰둔 누룩 뜨나니. 냄새 퍼지나니.

<구부러진 길>, 이준관

나는 구부러진 길이 좋다. 구부러진 길을 가면 나비의 밥그릇 같은 민들레를 만날 수 있고 감자를 심는 사람을 만날 수 있다. 날이 저물면 울타리 너머로 밥 먹으라고 부르는 어머니의 목소리도 들을 수 있다. 구부러진 하천에 물고기가 많이 모여 살듯이 들꽃도 많이 피고 별도 많이 뜨는 구부러진 길. 구부러진 길은 산을 품고 마을을 품고 구불구불 간다. 그 구부러진 길처럼 살아온 사람이 나는 또한 좋다. 반듯한 길 쉽게 살아온 사람보다 흙투성이 감자처럼 울퉁불퉁 살아온 사람의 구불구불 구부러진 삶이 좋다. 구부러진 주름살에 가족을 품고 이웃을 품고 가는 구부러진 길 같은 사람이 좋다.

<쉽게 씌어진 시>, 윤동주

창밖에 밤비가 속살거려 육첩방(六疊房)은 남의 나라, 시인이란 슬픈 천명(天命)인 줄 알면서도 한 줄 시를 적어 볼까, 땀내와 사랑내 포근히 품긴 보내 주신 학비 봉투를 받아 대학 노트를 끼고 늙은 교수의 강의 들으러 간다. 생각해 보면 어린 때 동무를 하나, 둘, 죄다 잃어버리고 나는 무얼 바라 나는 다만, 홀로 침전(沈澱)하는 것일까?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육첩방은 남의 나라, 창밖에 밤비가 속살거리는데,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의 나, 나는 나에게 작은 손을 내밀어 눈물과 위안으로 잡는 최초의 악수.

<파밭 가에서>, 김수영

삶은 계란의 껍질이 벗겨지듯 묵은 사랑이 벗겨질 때 붉은 파밭의 푸른 새싹을 보아라. 얻는다는 것은 곧 잃는 것이다. 먼지 앉은 석경(石鏡) 너머로 너의 그림자가 움직이듯 묵은 사랑이 움직일 때 붉은 파밭의 푸른 새싹을 보아라. 얻는다는 것은 곧 잃는 것이다. 새벽에 준 조로의 물이 대낮이 지나도록 마르지 않고 젖어 있듯이 묵은 사랑이 뉘우치는 마음의 한복판에 젖어 있을 때 붉은 파밭의 푸른 새싹을 보아라. 얻는다는 것은 곧 잃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