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수능특강 15

<산은 알고있다>, 신석정

산은 어찌보면 운무(雲霧)와 더불어 항상 저 아득한 하늘을 연모(戀慕)하는 것 같지만 오래 오래 겪어온 피 묻은 역사의 그 생생한 기억을 잘 알고 있다. 산은 알고 있다. 하늘과 땅이 처음 열리고 그 기나긴 세월에 묻어간 모든 서럽고 빛나는 이야기를 너그러운 가슴에서 철철이 피고 지는 꽃들의 가냘픈 이야기보다도 더 역력히 알고 있다. 산은 가슴 언저리에 그 어깨 언저리에 스며들던 더운 피와 그 피가 남기고 간 이야기와 그 이야기가 마련하는 역사와 그 역사가 이룩할 줄기찬 합창合唱소리도 알고 있다. 산은 역력히 알고 있는 것이다. 이슬 젖은 하얀 촉루(髑髏)가 딩구는 저 능선(稜線)과 골짜구니에는 그리도 숱한 풀과 나무와 산새와 산새들의 노랫소리와 그리고 그칠 줄 모르고 흘러가는 시냇물과 시냇물이 모여서 ..

<추사 글씨>, 김용준

어느 날 밤에 대산(袋山)이 "깨끗한 그림이나 한 폭 걸었으면." 하기에 내 말이 "여보게, 그림보다 좋은 추사 글씨를 한 폭 구해 걸게." 했더니 대산은 눈에 불을 번쩍 켜더니 "추사 글씨는 싫여. 어느 사랑에 안 걸린 데 있나." 한다. 과연 위대한 건 추사의 글씨다. 쌀이며 나무 옷감 같은 생활 필수품 값이 올라가면 소위 서화니 골동이니 하는 사치품 값은 여지 없이 떨어지는 법인데 요새같이 책사(冊肆)에까지 고객이 딱 끊어졌다는 세월에도 추사 글씨의 값만은 한없이 올라간다. 추사 글씨는 확실히 그만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 하필 추사의 글씨가 제가(諸家)의 법을 모아 따로이 한 경지를 갖추어서 우는 듯 웃는 듯 춤추는 듯 성낸 듯 세찬 듯 부드러운 듯 천변만화(千變萬化)의 조화가 숨어 있다는 걸 알아..

<존재의 테이블>, 나희덕

나에게는 '존재의 테이블' 이라고 남몰래 부름직한 앉은뱅이 탁자가 하나 있다. 노트 한권을 올려 놓으면 꽉차버리는 아주 작고 둥근 탁자인데, 나는 그걸 마루 한구석에 놓아두고 그 앞에 가 앉고는 한다. 모처럼 혼자 오롯하게 있는 날, 나는 무슨 의식이라도 준비하는 사람처럼 실내의 전등을 다 끄고 볕이 가장 잘 들어오는 창문 쪽을 향해 그 테이블을 가져다 놓는다. 그러고는 두 손을 깨끗이 씻고 차 한잔을 그 옆에 내려놓고 앉는다. 그렇게 테이블 위에서 책도 읽고 글도 쓰고 아니면 그저 멍하게 앉아 있노라면 마음의 사나운 기운도 어느정도 수그러드는 것이다. 어쩌면 아주 드물게 찾아오는 그 순간을 위해 나머지 시간들을 소란스러움 속에서도 살아내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나는 그 테이블을 인도 여행중 어느 토산..

<산촌 여정>, 이상

향기로운 엠제이비(MJB, 커피의 일종)의 미각을 잊어 버린 지도 이십여 일이나 됩니다. 이곳에는 신문도 잘 아니오고 체전부(遞傳夫, 우체부)는 이따금 '하도롱' 빛 소식(갈색 봉투에 담긴 편지)을 가져옵니다. 거기는 누에고치와 옥수수의 사연(농부들의 생활)이 적혀 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멀리 떨어져 사는 일가 때문에 수심이 생겼나봅니다. 나도 도회에 남기고 온 일이 걱정이 됩니다. 건너편 팔봉산에는 노루와 멧돼지가 있답니다. 그리고 기우제 지내던 개골창(개울)까지 내려와서 가재를 잡아먹는 곰을 본 사람도 있습니다. 동물원에서밖에 볼 수 없는 짐승, 산에 있는 짐승들을 가로잡아다가 동물원에 갖다 가둔 것이 아니라, 동물원에 있는 짐승들을 이런 산에다 내어 놓아준 것만 같은 착각을 자꾸 느낍니다.밤이 되..

<누룩>, 이성부

누룩 한 덩어리가 뜨는 까닭을 알겠느냐. 지 혼자 무력함에 부대끼고 부대끼다가 어디 한군데로 나자빠져 있다가 알맞은 바람 만나 살며시 더운 가슴, 그 사랑을 알겠느냐. 오가는 발길들 여기 멈추어 밤새도록 우는 울음을 들었느냐. 지 혼자서 찾는 길이 여럿이서도 찾는 길임을 엄동설한 칼별은 알고 있나니. 무르팍 으깨져도 꽃피는 가슴. 그 가슴 울림 들었느냐. 속 깊이 쌓이는 기다림 삭고 삭아 부서지는 일 보았느냐. 지가 죽어 썩어 문드러져 우리 고향 좋은 물 만나면 덩달아서 함께 끓는 마음을 알겠느냐. 춤도 되고 기쁨도 되고 해솟는 얼굴도 되는 죽음을 알겠느냐. 아 지금 감춰둔 누룩 뜨나니. 냄새 퍼지나니.

<도산십이곡>, 이황

원문 현대어 풀이 이런들 엇더ᄒᆞ며 뎌런들 엇더ᄒᆞ료. 초야우생(草野遇生)이 이러타 엇더ᄒᆞ료. ᄒᆞᄆᆞᆯ며 천석고황(泉石膏肓)을 고텨 므슴ᄒᆞ료. 연하(煙霞)로 집을 삼고 풍월(風月)로 벗을 사마, 태평성대(太平聖代)에 병(病)으로 늘거가뇌. 이 듕에 바라ᄂᆞᆫ 일은 허므리나 업고쟈. 순풍(淳風)이 죽다ᄒᆞ니 진실(眞實)로 거즛마리. 인성(人性)이 어지다 ᄒᆞ니 진실(眞實)로 올ᄒᆞᆫ 말이. 천하(天下)에 허다 영재(許多英才)를 소겨 말ᄉᆞᆷᄒᆞᆯ가. 유란(幽蘭)이 재곡(在谷)ᄒᆞ니 자연(自然)이 듯디 됴해. 백운(白雲)이 재산(在山)ᄒᆞ니 자연(自然)이 보디 됴해. 이 듕에 피미일인(彼美一人)을 더옥 닛디 몯ᄒᆞ얘. 산전(山前)에 유대(有臺)ᄒᆞ고 대하(臺下)애 유수(流水)ㅣ로다. ᄠᅦ 만흔 ᄀᆞᆯ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