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수능/국어 - 수필 4

<추사 글씨>, 김용준

어느 날 밤에 대산(袋山)이 "깨끗한 그림이나 한 폭 걸었으면." 하기에 내 말이 "여보게, 그림보다 좋은 추사 글씨를 한 폭 구해 걸게." 했더니 대산은 눈에 불을 번쩍 켜더니 "추사 글씨는 싫여. 어느 사랑에 안 걸린 데 있나." 한다. 과연 위대한 건 추사의 글씨다. 쌀이며 나무 옷감 같은 생활 필수품 값이 올라가면 소위 서화니 골동이니 하는 사치품 값은 여지 없이 떨어지는 법인데 요새같이 책사(冊肆)에까지 고객이 딱 끊어졌다는 세월에도 추사 글씨의 값만은 한없이 올라간다. 추사 글씨는 확실히 그만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 하필 추사의 글씨가 제가(諸家)의 법을 모아 따로이 한 경지를 갖추어서 우는 듯 웃는 듯 춤추는 듯 성낸 듯 세찬 듯 부드러운 듯 천변만화(千變萬化)의 조화가 숨어 있다는 걸 알아..

<신록예찬>, 이양하

봄 여름 가을 겨울, 두루 사시를 두고, 자연이 우리에게 내리는 혜택에는 제한이 없다. 그러나 그 중에도 그 혜택을 풍성히 아낌없이 내리는 시절은 봄과 여름이요, 그 중에도 그 혜택을 가장 아름답게 내는 것은 봄, 봄 가운데도 만산에 녹엽이 싹트는 이 때 일 것이다.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보고 먼 산을 바라보라. 어린애의 웃음같이 깨끗하고 명랑한 오월의 하늘, 나날이 푸르러 가는 이 산 저 산, 나날이 새로운 경이를 가져오는 이 언덕 저 언덕, 그리고 하늘을 달리고 녹음을 스쳐 오는 맑고 향기로운 바람─우리가 비록 빈한하여 가진 것이 없다 할지라도 우리는 이러한 때 모든 것을 가진 듯하고, 우리의 마음이 비록 가난하여 바라는 바, 기대하는 바가 없다 할지라도, 하늘을 달리어 녹음을 스쳐 오는 바람은 다..

<존재의 테이블>, 나희덕

나에게는 '존재의 테이블' 이라고 남몰래 부름직한 앉은뱅이 탁자가 하나 있다. 노트 한권을 올려 놓으면 꽉차버리는 아주 작고 둥근 탁자인데, 나는 그걸 마루 한구석에 놓아두고 그 앞에 가 앉고는 한다. 모처럼 혼자 오롯하게 있는 날, 나는 무슨 의식이라도 준비하는 사람처럼 실내의 전등을 다 끄고 볕이 가장 잘 들어오는 창문 쪽을 향해 그 테이블을 가져다 놓는다. 그러고는 두 손을 깨끗이 씻고 차 한잔을 그 옆에 내려놓고 앉는다. 그렇게 테이블 위에서 책도 읽고 글도 쓰고 아니면 그저 멍하게 앉아 있노라면 마음의 사나운 기운도 어느정도 수그러드는 것이다. 어쩌면 아주 드물게 찾아오는 그 순간을 위해 나머지 시간들을 소란스러움 속에서도 살아내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나는 그 테이블을 인도 여행중 어느 토산..

<산촌 여정>, 이상

향기로운 엠제이비(MJB, 커피의 일종)의 미각을 잊어 버린 지도 이십여 일이나 됩니다. 이곳에는 신문도 잘 아니오고 체전부(遞傳夫, 우체부)는 이따금 '하도롱' 빛 소식(갈색 봉투에 담긴 편지)을 가져옵니다. 거기는 누에고치와 옥수수의 사연(농부들의 생활)이 적혀 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멀리 떨어져 사는 일가 때문에 수심이 생겼나봅니다. 나도 도회에 남기고 온 일이 걱정이 됩니다. 건너편 팔봉산에는 노루와 멧돼지가 있답니다. 그리고 기우제 지내던 개골창(개울)까지 내려와서 가재를 잡아먹는 곰을 본 사람도 있습니다. 동물원에서밖에 볼 수 없는 짐승, 산에 있는 짐승들을 가로잡아다가 동물원에 갖다 가둔 것이 아니라, 동물원에 있는 짐승들을 이런 산에다 내어 놓아준 것만 같은 착각을 자꾸 느낍니다.밤이 되..